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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철학   다섯번째 이야기


                   찻잔에 매화 한 송이 배 띄우듯 

                                           

                                              박문현(동의대 철학과 교수)


통도사 큰 절의 150년된 홍매가 좋다지만 나는 10여년 밖에 안된 반야암의 청매를 더 좋아한다. 내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내내 그들 매화나무와 같이 살아 정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엔 내가 4년 전 언양장에서 사다 심은 것도 있다. 춘3월 이제 막 반야암의 그 매화들이 피고 있다. 매화가 필 때면 부산, 대구의 친구와 제자들을 불러 차를 즐긴다. 곧 필려는 매화 봉오리를 찻잔에 띄우면 매화는 기지개를 켜듯 팔을 벌리며 향기를 뿜는다.

 뜸이 잘 들어 경숙된 찻물을 차를 넣은 다관에 부어 2 · 3분을 기다린다. 그러면 차체(茶體)가 되는 탕수에 차라는 풍미스러운 신기(神氣)가 우러나며 그 물 전체에 퍼지게 되는 데 이것을 차신(茶神)이라 한다. 이 차신과 차체가 잘 인온(氤氳)이 되어야 간이 맞게 된다. 이 간 맞게 된 차야말로 우리의 입안을 상쾌하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차신이란 ‘노자’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라 할 때의 골짜기의 신비스러움과 같이 차의 신비스러움을 의미한다. ‘주역’에서는 “음양작용의 헤아릴 수 없음을 일러 신이라 한다.(陰陽不測之謂神)”고 했다. 이 때의 신은 만물을 오묘하게 하는 작용이다. 주자(朱子)는 이것을 “오묘하게 헤아리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물의 기운과 차의 기운이 다관에서 만나 만들어내는 오묘함이 차신이다. 이것은 음기와 양기의 만남이기도 하다. 음기와 양기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그 변화는 헤아릴 수 없으므로 신(神)이라고 한다. 노자는 “도가 나올 때는 그냥 담담할 뿐 그 맛이 없다. (道之出口 淡乎其無味)”고 했다. 도는 곧 무미(無味)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미’는 맛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차의 맛은 ‘무미’다. 그 맛을 헤아릴 수 없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달지도 떫지도 쓰지도 않지만, 달기도 하고 떫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그러므로 처음 녹차를 마시면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한다.  또 차는 현묘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차의 맛을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는 도(道)인 것이다. 

  찻물과 차의 만남을 ‘주역’의 괘로 풀어보자. 차는 오행 가운데 목(木)에 해당하고 탕(湯)은 수(水)이다. 그러므로 차는 손(巽)괘이고 물은 감(坎)괘로 풍수환(風水渙)괘  가 된다. ‘환괘’는 바람과 물로 구성된 괘이다. 바람이 물 위에 불면 물결이 흩어지기 때문에 ‘환괘’는 흩어지는 이미지이다. 

   ‘환괘’는 ‘환(渙)’이 눈 녹듯이 서서히 녹아 흩어지는 것을 의미하듯 엉킨 문제가 눈 녹듯이 풀리므로 서둘지 말 것을 말한다. 특히 상괘 손(巽)은 바람과 함께 나무도 뜻하므로 ‘환괘’는 나무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나무를 타서 공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나무배를 타고 큰 내를 건너는 공을 세운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차가 물과 어우러져 신묘한 작용을 하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환괘’는 바람이 불어 물위를 덮고 있는, 티끌과 여러 가지 어지럽고 지저분한 물건들을 말끔히 쓸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더러운 것들을 걷어 버리면 물은 다시 맑고 깨끗해지고, 물결을 불러일으키면 정체해서 부패하고 있던 수면에는 다시 생기가 돌게 된다. 이것이 ‘풍수환괘’의 모습이다. ‘환(渙)’은 날이 새면 어둠이 흩어지고, 봄이 오면 얼음이 풀리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한다. 

‘주역’ 64괘중에 이 ‘환괘’처럼 속 시원한 해방감에 후우 큰 숨을 내뿜게 하고 밝은 희망에의 의욕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괘는 없다. ‘환괘’는 지루하던 긴 장맛비가 씻은 듯이 개고 먹구름은 사라져 하늘은 다시 바다처럼 푸른데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 순간의 심경을 상징한 것이다. 비좁고 답답한 새장 속에 갇혀 있던 학이 그 괴롭던 구속을 벗어나 막 무한대의 창공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는 순간의 상태를 상징한 것이기도 하다.

  차의 신기(神氣)와 참된 수성(水性)이 서로 잘 어울리고 융화된 화해(和諧)의 상태에서 초의는 ‘신령스럽다’고 말했다. 무한 절묘함을 말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몸소 딴 햇차를 보내준 데 대하여 유종원(柳宗元)이 감사하며 쓴 다음 시를 보자.


향기로운 차는 오죽 사이에 우거지고 / 잎사귀는 이슬에 젖어있네. / 눈 덮인 산의 나그네 되어 / 이른 아침에 신비로운 차싹을 따네. / 화덕을 돌 여울 위쪽에 차려 놓으니 / 바로 옆에는 붉은 암벽이라네. / 둥글고 네모난 예쁜 모양 / 홀(笏)처럼 흠도 하나 없네. / 아이 불러 세발솥에 불 지피니 / 차 향기 멀리 퍼지네. / 근심을 씻어 주니 본 모습 드러나고 / 혼미함 가셔 내니 내 자신으로 돌아가네. / 오직 감로수와 같이 / 향기로운 차는 참선하기에 좋은데 / 아 신선(神仙)을 동경하는 친구들이여 / 어찌하여 신선주만 구하려 하는가.


  여기서 유종원은 차와 물이 만나 이루어지는 신묘한 작용은 근심을 씻어주고 혼미함을 가셔내기에 신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환괘’에서 바람이 불어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말끔히 씻어내고 학이 창공으로 날아가는 듯한 선경을 상징한다는 것과 다름이 있겠는가?  

  이제 매화는 찻잔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가고 있다. 내 가슴의 번뇌를 가르고 차는 매화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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