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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현(동의대교수,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회장)
금요일까지 책과 컴퓨터에 묻혀 있다 토요일이 되면 즐겁다. 학회 일이나 다른 행사가 있을 때를 빼곤 거의 매주 이 곳 반야암에 온다. 주례를 담당할 경우를 제외하곤 친지의 결혼식도 인편에 축의금만 전달한다. 통도사 산문을 들어설 때의 그 후련함. 내세의 천상으로 오르는 그 해방감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하며 영축산 자락의 반야암으로 뱀이 그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쑥 들어온다.
나의 소실이 방을 비워놓고 반가이 맞이한다. 먼저 소실과의 워밍업. 아궁이의 그 큰 입에 가득 불을 물린다. 그리고는 물 한통 받아와 전기포트에 넣고 끓인다. 차탁을 끌어 방 가운데 놓고 차를 꺼내 다관에 넣는 그 짧은 시간에 물은 성급하게 끓는다. 이 때의 차 한잔은 1박2일 동안 나와 동거할 또 하나의 소실이 된다. 물론 우리가 조선조의 풍속화에서 흔히 보는 차동이 풍로에 돌솥을 올려놓고 부채질하는 정취가 전기기구의 편리함에 묻혀 버린게 아쉽기는 하다.
자연의 원리를 통해 인간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주역의 철학을 인생의 지침으로 여긴 육우(陸羽)는 ‘다경(茶經)’의 ‘차의 그릇’에서 주역을 인용하여 화해(和諧)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다구 중의 하나인 풍로의 다리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다.
“풍로는 보통 세 개의 다리가 있는데 거기에 옛 글자 21자를 적는다. 한쪽 다리에는 물은 위, 바람은 아래, 불은 중간[坎上巽下離於中]이라고 적고, 또 한쪽 다리에는 몸은 오행을 고르게 하여 모든 병을 물리친다[體均五行去百疾]고 쓰며, 나머지 한 다리에는 거룩한 당나라가 오랑캐를 물리친 다음 해에 만들었다[聖唐滅胡明年鑄]라고 쓴다.”
육우는 위와 같이 적고는 물과 바람과 불에 대해서 주역의 괘로 설명한다. 풍로 안에는 둔덕을 만들어 세 개의 칸막이를 설치한다. 그 한 칸막이에는 꿩을 그린다. 꿩은 불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에 불의 괘인 이괘(離卦, ☲)를 그린다. 또 한 칸막이에는 표범을 그린다. 표범은 바람을 일으키는 짐승이기에 바람을 상징하는 손괘(巽卦, ☴)를 그린다. 또 다른 칸막이에는 물고기를 그린다. 물고기는 물속에 사는 동물이기에 감괘(坎卦, ☵)를 그린다. 손괘는 바람을 주재하고, 이괘는 불을 주재하고, 감괘는 물을 주재한다. 바람은 불을 일으킬 수 있고 불은 물을 끓일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이 세 개의 괘를 갖추는 것이다.
이것은 물과 불과 바람이 화해의 상태에 이를 때 간이 맞는 차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차는 다만 물을 끓여 간맞게 하여 마시면 되기 때문이다. 물을 끓인다는 것은 물과 불이 만나게 하는 것이다. 물과 불이 조화롭게 만나기 위해서는 불의 조절 곧 화후(火候)가 중요하다. 바람이 불을 조절하는 화후를 상징한다. 화후는 원래 도교의 금단(金丹)을 제조할 때 쓰는 용어이다. 위백양(魏伯陽)이 쓴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서는 금단을 만들기 위한 솥은 건괘(乾卦)로 하고 아래에 있는 화로는 곤괘(坤卦)로 한다. 그리고 솥에 넣는 약재는 감(坎)과 리(離)로 한다. 불을 때는 것을 화후라 하여 64괘 중 ‘건곤감리’ 네 괘를 뺀 60괘로 한다. 화후의 비중은 이렇게 큰 것이다. 화후를 잘 해야 약탕기[솥]속의 물[水]과 불[火] 두 기(氣)가 잘 조화되어서 중(中)을 얻게 된다.
위백양은 이러한 우주관을 바탕으로 하여 종래의 내단(內丹)과 외단(外丹)의 이론을 종합했다. 이것을 기공(氣功)의 이론으로 말한다면 솥은 인체에, 약물은 음양의 기(氣)로, 화후는 호흡과 의념(意念)의 조절에 비길 수 있다. 효당 최범술도 화후를 중시하여 그의 저서인 ‘한국의 다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을 끓일 때는 화력이 센 불을 필요로 할 때도 있고 또 화력을 미미하게 잘 보존해야 될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그 화롯불을 보는 것을 화후(火候)라고 하고, 그 화후의 용심(用心)은 차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를 간수하는 용심이나 법제하는 용심이나, 화후하는 용심은 내면적으로 상호 연결되는 엄격한 형식이다.”
이렇게 보면 육우가 풍로에 물과 불과 바람을 주역의 괘로 그린 것은 단순히 물, 불, 바람이 차를 끓이는데 중요한 세 가지 요소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과 바람이 잘 만나야 화후의 조절이 되는 것이므로 불과 바람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주역에서 불과 바람의 관계를 말하는 괘에 화풍정(火風鼎)괘 가 있는데, 이것은 마침 솥을 말하는 괘이다. 이 괘의 상괘는 리(離)괘이고 하괘는 손(巽)괘이다. 리는 불을 상징하고 손은 바람 또는 나무를 나타낸다. 불이 나무 위에서 타고, 바람이 이것을 부채질하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 불은 나무가 있어야 타오를 수 있고, 타오르는 불은 바람을 얻으면 더욱 그 기세를 펼 수 있다.
불과 나무와 그리고 바람은 서로 호흡이 맞는 요소들이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한 존재요, 모두가 어떤 목적을 위해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가 제 할 일을 즐겁게 수행하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팀워크의 결과, 곧 화해를 이루는 것이 된다.
또 이 괘를 다른 각도로 풀이하면 상괘 리는 불, 불은 광명이니 현명을 의미하고, 하괘 손은 바람, 바람은 좇는 습성이 있어서 순종과 겸손을 의미한다. 윗 사람의 현명에 아랫 사람들은 겸손한 태도로 순종하는 모습이다. 상하의 마음이 서로 호응하고 협력하는 화해의 상태를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호응하고 협력하는 화해의 상태를 솥[鼎]으로 표현한 것은 다사(茶事)와 관련 지워 생각해 볼 때 의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