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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현(동의대 교수,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회장)
절에 가서 스님들을 만나 대화할 때면 으레 차를 마시게 된다. 스님이 손님을 맞는 방은 대체로 별 장식이 없다. 차탁과 그 위에 다기 몇 점이 놓여 있는 게 전부이다. 차실이라 할 수 있다. 사찰에는 차밭이 있는 곳이 적지 않고 신도들이 다도회를 만들어 차를 배우고 마시며 헌다례를 올리는 곳도 많다. 근래에 와서는 커피를 애용하는 스님들도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그래도 차가 불가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불교인이나 일부 지식인들 중심으로 기호품의 하나로 차문화가 형성 되어 있으나 일본이나 중국은 다반사(茶飯事)라는 말과 같이 온 국민들의 음식문화의 하나로 정착되어 있다. 필자도 차마시기를 즐긴다. 오랜 시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하노라면 머리가 멍해지고 입이 마르며 온몸이 뒤틀리기도 한다. 이럴 때는 차를 마신다. 물론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같이 차를 나눠 마신다. 이러다 보니 필자의 생활 가운데 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필자의 전공분야는 동아시아 사상인데 그 중에서도 양생사상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터라 동의대 철학과에 석사 박사 과정을 개설하면서 국내에선 처음으로 ‘氣사상’전공을 마련했다. 이 안에는 ‘다도와 고전’, ‘다도와 예술’, ‘다도와 문화’ 같은 과목도 넣었다. 이 전공과정을 통해 ‘차문화와 유가의 중화(中和)사상’, ‘동양 차문화에 나타난 도가사상’,‘일본 다서에 나타난 불교사상’같은 석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동양사상의 주요 분야는 유가와 불가와 도가이다. 이 삼가(三家)는 차문화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차문화에도 여러 갈래가 있지만 어떠한 유파도 이 세 사상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유파가 어느 사상에 속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육우 역시 마찬가지다. 먼저 유가는 차로써 도를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유가의 차인들은 차의 본성에서 영감을 얻고, 차를 마시면서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를 바로세움으로써 남을 배려할 수 있고 나아가서 치국 평천하의 길에 나설 수 있다고 한다. 도가는 인간들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도가 나오는 곳은 담백하고 그 맛이 미묘하다고 하는 데서 차의 자연성과 상통함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차문화의 허정염담(虛靜恬淡)의 본성이 확립되었다. 도가의 은일(隱逸)의 정신 역시 차문화의 정신세계를 넓혀 주었다. 불가의 선종은 차문화의 흥성과 발전에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선불교는 차의 재배, 차 마시는 형식 및 차 문화의 미학적 경지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특히 중국의 차문화가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는데 그 공이 크다. 품명(品茗)의 중요성에 대해 선불교는 유가와 도가에 비길 수 없는 역할을 했다. ‘끽다거(喫茶去)’, 이 한 마디의 선어(禪語)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다도의 정신세계를 개괄하고 있다.
동양의 근본사상인 유․불․도는 차문화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고 그 중에서도 ‘주역’의 사상이 차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됨을 알 수 있다. 특히 국이 여러 식재료가 어울려 맛을 내듯 ‘주역’의 화해(和諧)정신이 차문화에 내재되어 차를 도(道)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주역’은 우주의 끝없는 변화를 태극으로 부호화해서 나타내고 이것을 다시 음양의 양의(兩儀)와 사상(四象)과 팔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팔괘를 중첩해서 64괘를 이루고, 이것으로써 천지 만물과 인간의 모든 일을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다. 물과 불이 만나 찻물이 끓는 화해의 소리는 천뢰(天籟)가 되고 차와 물이 만나 이루어내는 색과 향기와 맛은 우리를 선경(仙境)으로 이끌어 준다. 필자는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는 ‘주역’으로 이러한 관계를 해석해 보는 논문을 지난 4월 대만에서 열린 국제학회에서 발표한 바 있어 여기에 그 요지를 적어 본다.
‘다경(茶經)’을 써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당나라의 육우(陸羽)는 그의 성명을 ‘주역’에서 따왔다. 육우는 어릴 때 어떤 승려가 강가에서 데려와 길렀기에 그의 정확한 성도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주역’을 좋아하였기에 ‘주역’으로 점을 쳐서 성명을 찾기로 했다. 점괘는 수산건(水山蹇) 이 나왔으나 건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수산건괘의 상육효를 변효로 하여 지괘(之卦)인 풍산점(風山漸)괘 를 택했다.
점(漸)괘는 바람 혹은 나무를 상징하는 손(巽)괘가 위에 있고 산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아래에 있는 괘로 천천히 날아 올라가는 점진의 괘이다. 그는 “기러기들이 공중으로 높이 날아가도다. 그 깃털이 의전(儀典)을 위해 쓸 만하도다. 길하다.[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 吉]”는 상구효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육우는 ‘鴻漸于陸’에서 ‘육(陸)’을 성으로 하고 ‘其羽可用爲儀’에서 ‘우(羽)’를 이름으로 뽑았다. 그리고 큰 기러기가 나아가는 ‘홍점(鴻漸)’을 그의 자(字)로 정했다. 상효는 흩어졌던 기러기들이 모여 대열을 짓고 날아올라 하늘 높이 비상하여 태양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상으로서 점괘 여섯 효 가운데 가장 길하고 또 다른 괘의 평범한 길효 보다 훨씬 더 길하다. 빌헬름이 이 효를 “완벽한 모범적 인간의 삶은 그를 전범(典範)으로 우러러보는 지상의 인간들에게 밝은 빛이다.”라고 주석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차문화의 밝은 빛으로 존재하는 육우를 가리켜 한 말로 들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