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역사
한자의 역사
* 원시 상형문자 시대
발굴된 토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가슴이 뛴다. 그 오래된 시간 속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니…
바로 그 세월의 향기 속에 물고기 그림이 들어앉아 있다. 아무리 보아도 물에서 갓 잡아 올린 젖은 몸은 아니다. 분명 그건 ‘디자인’이다.
한자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동양인들이 자신들 삶의 날줄과 씨줄의 획으로 엮어놓은 역사의 무늬였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l
* 갑골문 시대 (은나라. 그림문자를 안고 역사 속으로 들어서다)
중국, 전설까지 역사로 만드는 나라. ‘하상주공정’은 전설속의 하상주를 살아 있는 역사로 만들기 위한 한족(漢族)의 문명사적 과제다. 중국인들의 문화 정치학적 열망이 ‘전설’ 을 ‘현재’로 살려낸 것이다.
한자는 그림합치기 사각형 안에 여러 개의 자형들을 채워 넣으면서 일련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덕분에 수많은 문자들을 거의 무제한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자 대량생산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의미와 의미를 합치는 방법으로 회의(會意)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의미와 소리를 합치는 방법으로 흔히 형성(形聲)이라고 한다. 현대 한자의 약 80%에 해당되는 숫자가 거의 형성의 그림 합치기 기법으로 만들어져있다.
은나라가 오랜 세월을 숙성시켜 온 역사적 경험은 후대 주나라의 발전을 돕는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주나라의 문화는 모든 동양문화에서 주류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동양사회의 언어 문자적 정체성은 주나라의 문화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고, 주나라 문화의 시원은 은나라 갑골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 금문시대 (주나라. 한자를 청동기에 새기다)
주나라의 혁명은 많은 지식인들의 마음에서 우러난 호응을 얻었던 메이지유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무인들의 완력에 기댄 전중부류나 전두환류의 쿠데타에 가까웠다.
무(武)는 은나라를 깨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왕의 시호. 반면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문(文)이라는 시호를 만들어 주었다. 중국왕실의 족보 위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나라 왕에게 주어진 시호 문(文) 문, 단순한 하나의 글꼴이었지만 그것은 머지않아 중원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지적 힘겨루기가 본격적으로 벌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문화적 기호임과 동시에 제자백가들의 머리를 빌려 벌어지게 될 치열한 세력다툼의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사투리의 갈래가 어떠하든 하나의 글꼴로 사람들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천자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문자를 통한 문화의 통일, 전 세계로 흩어진 중국인들이 13억이 넘는 중국인들이 모두 한 덩어리로 뭉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자가 중국인, 중국문화를 일통(一統)시켜 갈 수 있음.
일통이란 하나의 가치를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점차 넓혀 가는 문화적 정복 행위이고, 통일이란 한 덩어리의 문화가 나뉘었을 때, 다시 합쳐지는 문화적 회복과정을 뜻한다.
한자의 독창적 디자인은 생성과 동시에 각 지역 간의 상화교류를 점차 어렵게 만드는 한계의 벽을 쌓아간다.
맹약을 통해 자라난 문자의 권위, 그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새로운 디자인. 이 상황은 훗날 진시왕이라는 걸출한 문화 CEO가 등장하기까지 지속된다.
한자가 디자인적인 측면에 몰두하면서, 바꾸어 말해 치장에 빠져들게 되자 내용은 오리려 부실해지기 시작했다.
* 전서시대 (진시왕, 문자통일로 중원을 일통시키다)
‘한번 신하의 몸, 죽도록 신하의 몸’의 결속이 무참히 깨어져 가면서 배반은 차라리 일상의 덕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현대인들은 이런 고뇌의 결단을 흔히 자아의 재발견이라고 한다.
진나라 상앙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각 가정의 빈부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열다섯씩 묶어 관리하는 이른바 십오제를 실시, 수직의 충(忠)이 수평으로 내려앉는 순간.
나이 서른아홉, B.C 221년에 중국 최초로 황제가 된 사내, 중원에 흐르는 변화의 기운을 온몸으로 감지하고 그 흐름 위에 올라탄 사내, 중국 최초의 지적 제국주의가 탄생하는 순간. 중원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산시 지역, 이런 촌 동네에서 시대를 리드하는 인물이 탄생. 역사를 바꾼 인물들은 대부분 빈한한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한나라의 유방이 그랬고, 명나라의 주원장이 그랬고, 마오쩌둥 역시 촌놈이었다.
진시황은 중원의 패자가 되자마자 그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 정책을 시행한다.
당시 중원 한자의 글꼴들이 변형과 사투리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졌다면 중국은 지금 쯤 유럽처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졌을 것이다.
분산이란 어떤 면에서는 통일보다 아름답다. 다양성이란 살아있는 존재 모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태생적 매력이다.
만일 그때 진시황이 뛰어들지 않았고, 문자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중국은 지금쯤 적어도 아홉 개의 덩어리로 나눠져 있을 것이다. 일곱 개의 사투리 지역과 어차피 내면적으로 다시 두개 정도로 쪼개지 않으면 안 될 넓은 관화 사투리 지역들로 이루어진 아홉 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마치 유럽처럼.
진시황은 이 단 여섯 개의 글자로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 제국주의의 첫 페이지를 열어, 특히 바퀴 축의 크기가 통일되어야 어느 지역을 가고 바퀴를 갈아 끼울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생각과 ‘마차’ 가 중국 전역을 물 흐르듯 관통할 수 있도록.
곡선이 권위라면 직선은 효율이었다. 곡선이 명사라면 직선은 동사였다. 간편한 직선, 직선이 곡선보다 빠르다는 것은 공간 이동에 이점으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글자 사용에 자신감을 획득한 사람들은 아무 일에다 한자를 끌어들였다. 크고 작은, 시시콜콜한 일까지 문서화하기 시작. 당시는 새로운 법 적용으로 범법자가 양산되던 시기에 옥리들은 이들 간편한 서체를 의도적으로 사용, 바로 예서(隸書)다.
예서는 옥사처리를 위해 따로 만든 글꼴이 아님. 진시황 이전에 이미 민간에서 사용되고 있었음.
* 예서시대 (한나라, 동아시아의 한자 인프라를 완성하다)
종이, 그것은 딱딱한 대나무 저각들과 비견할 수 없으리만치 넓고 시원했다.
종이는 한자의 지적 소유권을 독점. 제 아무리 놀라운 깨우침을 가슴속에서 지펴낸들 종이를 얻지 못한 자, 펼칠 기회 또한 얻지 못하게 되었다.
지적 위화감이 탄생하는 순간, 신분 계급 소득 그리고 권위를 재단할 쉬 있는 새로운 심판자로 동양문화의 무대 전면에 등장. 매끄러운 대나무 조각 위에서 먹물을 줄줄 흘리던 한자의 입장에서 보면 종이는 거의 오늘 날 컴퓨터수준. 경서 한 권 분량의 죽간이 작은 수레를 가득 채우던 시대에 등장한 종이, 그 가벼움과 얇음의 충격. 컴퓨터CD등장과 버금.
자료들을 살펴볼 때 종이의 성품을 가장 잘 소화해낸 ‘조전비(曺全碑).
글씨가 어딘지 살아있는 듯한 느낌, 필획이 넘실대고 있기 때문이다. ‘조전비’의 예서가 지니고 있는 그 삐딱함과 넘실댐의 감성, 전체적으로 폭이 넓고 우측이 길게 빠지는 글자 틀을 유지하고 손이 오른쪽으로 뻗치게 되는 자연스러운 동작에서 지식인들 특유의 여유가 묻어난다. 동시에 백지 위를 넘실대는 오만함이 겸손한 듯한 모습으로 열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기품’이라고 한다.
초서, 좁은 죽간에 몸부림하다. 필획마다에는 손이 살아 있고,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물방울은 또박또박해야 했고, 나무는 가지가 반듯해야 했다. 그래야 문자였다. 하지만 말단관리들은 다 귀찮았다. 그저 자신만 알아보면 그만인, 필획의 해체와 재구성, 피카소의적인 전환. 죽간위의 흘림체는 관리들의 단순 기곡이거나 사안의 대략을 메모해보는 과정에서 만듦. 사람들은 너도나도 흉내를 냄. 갑작스런 유행. 그 멋들어진 반향을 초(草)라 불렀다. ‘초’라는 한자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의 이미지를 통해 붓의 자유로움을 드러냄. 훗날 초안(草案)이라는 말은 그래서 실수가 용납되는 공간이 되고 만다.
어느 사회에서나 지식은 권력이고, 권력은 신분 상승을 돕는 도우미이기 때문,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몸을 다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일종의 투자이다. 한나라 때 한자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의 신분 상승이 보장된다는 뜻.
한자라는 약 7000여 장의 한자 벽돌로 동양이라는 거대한 문화의 집이 지어진 셈.
* 초서, 행서의 시대 (위진남북조시대의 한자, 이민족을 아우르다)
이 시기는 파격과 해체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움트는 역동의 시대. 중국적인 르네상스. 그 파격의 자유를 이끈 두 가지 동력은 도가와 불교였다. 그 서로 다른 문화권을 맺어준 매파의 역할은 한자가 했다.
사람들은 불경을 비단과 종이 위에 베끼기 시작했다. 이른바 필사본의 등장.
빨리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러나 아픔을 다스려야 한다는 또 하나의 초조함, 이 어울리지 않는 두 마음의 번뇌를 우리는 필사본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필사본 그 자체가 구도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필사본은 새로운 글꼴을 등장. 초서보다 침착하지만 예서보다는 서두른 흔적이 분명한 글꼴, 사람들은 이것을 행서(行書)라고 불렀다.
이 자유의 세계를 가장 깊은 곳까지 여행한 인물은 왕희지(王羲之) 307~365 였다.
왕희지의 ‘난정서’는 한 중 일 삼국의 서예가들 모두가 천하제일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횐 여백을 헤치며 드러낸 검은 먹 선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든 것은 난정서가 처음이다. ‘난정서’ 안에 등장하는 20개 지(之)자의 글꼴이 서로 다르다는 현상도 왕희지의 천재성을 아는 좋은 예가 된다. 사람 숭배를 즐기는 중국인들은 그런 연유로 그를 서성(書聖)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북쪽은 돌에 새겼고 남쪽은 종이에 흘렸다.
위진남북조 당시 남과 북의 문화는 완전히 달랐다. 언어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풍습도 달랐다. 단 하나 일관된 것이 있다면 한자였다.
북쪽 사람들은 호방했고 남쪽 사람들은 꼼꼼했다. 또 북쪽 사람들은 활동적이었고 남쪽 사람들은 거기에 비하면 소극적이었다. 북웅남수(北雄南秀). 북은 웅장한 맛이 있고 남은 깔끔한 맛.
결국 북쪽의 글꼴은 점차 솔직하고 열린 모습이 되었고, 남쪽의 글꼴은 디자인이 섬세하면서도 뒷맛이 감돎. 북쪽 민족들은 돌을 쪼아 자신들의 글을 새기고 남쪽 민족들은 종이 위에서 사뿐사뿐 붓을 움직였다.
남쪽 사람들의 글은 상대적으로 더욱 부드러운 느낌을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비석이 금지된 남방에서는 대신 묘지 내에 묻어두는 이른바 묘지명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를 북비남첩(北碑南帖) 북쪽 글씨는 비석에 남아 있고, 남쪽 글씨는 서첩에 남아있다.
* 해서시대 (동아시아의 표준 한자 글꼴 해서, 당나라 때 완성되다)
이연은 아들 이세민에게 서둘러 자리를 물려준다. 사가들은 이 축복받은 아들을 당태종이라 불렀다.
당태종은 음악과 서예를 사랑했다. 인간의 지적세계가 서예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 인품과 능력이 검은 먹과 종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조형미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 이런 깨달음의 경지로 이끈 스승은 왕희지.
해법추미(楷法추美)미적 감각을 온몸에 담아 놓는 경지. 해서 쓰기의 열풍은 당태종이 일으켰다.
서예(한국) 서법(중국) 서도(일본) 붓글씨의 최대매력은 아름다움이다.
신언서판(身言書判) 당태종 때 인물평가 기준은 몸의 건강상태 어휘력 글씨 사안과 상황에 대한 판단력.
당태종은 조서를 내려 당시의 수도인 장안의 관리들 중 오품이상의 관리들은 모두 홍문관에서 글씨 공부를 하도록 했다.
권력이 글꼴을 챙겼다! 황제가 서생들의 글씨까지 관리하는 문화 속에서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다.
구양순 후난출신 남방문화권. 해서의 모범.
글꼴 전체가 정돈되어 보이는 반면 정감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필획이 글꼴의 중심부와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에 긴 문장을 써도 전체적으로 통일성유지. 남방특유의 섬세함과 사려 깊음. 조금은 얌전한 생동감.
안진경. 파격적인 운필과 생동감 있는 글꼴은 구양순 해서의 아성을 일순간에 무너뜨림. 글꼴 가운데를 중심으로 필획이 밖으로 휘도록 하여 전체적으로 둥근 모습을 유지하려는 조형미를 강조. 운동감과 긴장감은 구양순의 선비 기질을 넉넉히 넘어섬. 얼핏 보면 구양순의 필획이 더 날카로워 보이지만 붓이 거두어지는 끝 부분은 안진경의 그것이 보다 날이 서 있다.
귀족은 붓으로 쓰고 서민은 칼로 새기고
문화적 인프라가 사회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이라고 자각한 당태종은 서적의 수집과 관리에도 국력을 쏟았다.
조정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책을 두 권씩 베껴 두도록. 민간은 모륵(模勒)나무판에 글을 새겨 찍는 최초의 인쇄기술. 똑같은 한자를 두고 귀족들은 쓰고 서민들은 새기는 상층 하층 각각 발전.
화약 나침판 종이 인쇄술 세계 4대 발명품
귀족들이 붓을 들고 종이 앞에 앉아 있는 동안 그들은 칼을 들고 나무판 앞에 앉는 것은 불교와 시 때문.
불교가 보급되면서 베끼기 작업. 필사본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어. 처음에는 한 사람이 불경하나를 놓고 베낌. 공금이 달리자 한 사람이 불경을 읽으면 수십 명이 낮아 받아쓰는 방식. 중국 전역에서 온 승려들이 각자의 사투리로 낭독. 부수 발음 자기 멋대로.
판각은 이런 고민 끝에 태어난 지적 탈출구. 당나라 목종 때 당시 유명한 시인이던 백거이 작품이 판각에 찍혀 시중에 팔림. 시작품의 경우 기녀들과 시인 묵객들이 주요 고객.
* 해서와 활자체의 시대 (송나라와 중원의 북쪽, 서로 다른 마음으로 한자를 쓰다)
송나라 사회의 상상 문학예술 무역 각 영역마다 개성, 즉 의(意)의 세계를 넓혀가려는 시도 속에서 송나라 남방 지식인들의 개성 표출 욕구는 급기야 나무를 째고, 올을 쪼개 자신들의 의미를 밀어 넣으려는 압(押)의 문화를 만듦.
상업문화가 발달하면서 개인의 신용이 중요해지자 도장이라고 하는 특별한 도구가 등장. 문서가 완결된 후 그 신뢰를 증빙하는 개인용 표식.
송나라의 압장은 과감하게 해서의 파격을 감행. 그것도 이름 전체가 아닌 성만을 사용해 경쾌함을 드러냄. 송나라 사회는 그 가벼움까지 개성 표출에 경박함이 아니라 경쾌함처럼 느껴졌다.
압장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은 한자를 조각조각 나누워 옮길 수 있음을 깨달음. 살아 있는 글자, 바로 활자(活字)
* 해서와 판각체의 시대 (원나라와 명나라, 한자 발전의 맥을 꺾다)
당나라의 이세민 그는 황제이자 예술가였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정돈시켜야하는지 아는 문화적 CEO이기도 했다. 당태종은 해서라는 글꼴을 디자인. 예뻤다. 그보다 아름답게 부수와 부호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없었다.
한자가 중원의 지적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받침대는 과거제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대가 사라졌으니 배우 역시 짐을 꾸려야 했다.
성공한 시대의 영웅들은 모두 한자의 글꼴을 개혁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족의 문화적 역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원나라는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게 되는데.
당시 한족이 할 수 있는 벼슬은 하층 계급에 국한되어 있었다. 어설픈 글쟁이들은 쉽게 탐관오리가 되었고 생각이 깊은 지식인들은 염세적인 작가로 변신하였다. 원나라 때의 문학작품들이 신통치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작품에는 우울과 허탈 그리고 무력감에서 피어오른 염세의 그림자가 짙데 드리워져 있다.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한자
100여 년간 중원을 다스리던 몽골족은 초원으로 돌아가고 중원에는 다시 한족이 들어섰다. 돌아갈 초원이 있었던 몽골족은 초원에서 잃었던 과거를 추슬렀고, 한족은 중원에서 깨진 역사를 주워 담았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사살 탐관오리가 전국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원나라 말기부터였다.
얼굴이 심하게 얽은 한 사내. 어린 나이에 굶어죽은 아버지 어머니, 형의 시신을 묻기 위해 제 손으로 흙을 팠다. 울분을 자산으로 거대한 군사 조직을 이끄는 지위자로 다시 태어난 인물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몽골족에 눌려 있던 한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해 유교를. 당나라 때의 제도와 문화를 통해 한족의 민족 역량을 회복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개인적 성품은 국가의 발전을 효과적으로 담보하기에는 역부족.
변덕과 의심에 늘 마음이 불안했던 주원장은 수많은 주변 인물들을 죽엿다. 그가 참수형으로 죽인 사람들이 십만에 달한다는 기록.
경제적으로 지극히 검박한 생활을 한 반면 자신의 호위를 위해 7만 5000명의 호위대를 운영하며 막대한 재정을 낭비하기고 했다. 거친 삶과 영민한 두뇌 덕분에 속임수와 간파력이 자연스레 몸에 밴 그를 서구 역사학자들은 폭력적 기질과 과대망상증환자로 묘사.
각 지역의 서원들을 허용해 유교경전을 연구하게 함.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지침은 복잡한 정치 현실보다는 사색이 더 안전한 피난처임을 직감한 지식인들의 입맛에 잘 맞았다. 주자의 제자들보다 더 깊은 사색의 숲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의 두 지식인 그룹은 각자 다른 숲에서 벌목해 온 사색의 나뭇가지로 서로를 찔러댔다.
그들은 한자의 글꼴이야 어떠하든 단지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낼 수만 있다면 좋았다. 특히 강남지역의 서원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날카롭고 명쾌하며 논리적인 글을 만들어 상대의 부도덕함을 드러낼 수 있을까.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생산되다.
정작 글꼴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은 당시의 ‘사자인(寫字人)’ 요즘말로 출판업자들.
할 말이 많은 시대에 사자인들이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방법은 ‘밀행소자(密行小字)’ 민간인들에게는 그 방법밖에 길이 없었다.
* 마지막 해서 시대 (청나라, 금석학을 통해 한자의 숨은 세계를 엿보다)
만주족은 표음문자인 만주 글을 사용하고 한족들은 모두 그림문자인 한자를 사용.
청나라 황실은 언어정책을 이원화하기로 결정. 황실의 내부문건이나 중요 행정 서류는 모두 만주어를 사용하고, 중요 행정 서류의 경우는 만주어와 한자를 동시에 표기.
직책에 만주인과 한인을 동시에 임명하는 이른바 만한병용제 채택. 유능한 한인에게는 일거리를 주되 충성스런 만주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감시하도록 하는 제도.
유교의 덕목들이 통치에 무척 유리하다는 점도 깊이 간파, 유교적인 형식 사상을 빌어 정치적 권위를 유지하려고 경전을 공부하고 한자를 깊이 연구함. 대표적 인물이 강희황제
강희황제는 판단력이 예리하고 지적인 사람, 사실상 중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역사의 강을 따라 흐르는 한족의 말소리와 글꼴이며 그것이야 말로 중원 문화를 지배하는 역강이라고 직감. 역사는 투명했고 솔직한 자는 내면을 볼 수 있는 법. 그런 점에서 강희황제는 그 누구보다도 역사 앞에서 솔직한 인물이었다. 康熙字典만듬.
‘궁하면 변해야 한다’ 그렇다 한자로 사상이나 생각이 담긴 글은 차라리 쓰지를 말자.
이것이 바로 금석학이 생겨난 배경이다. 금석학은 처음부터 금석학이 아니었다. 달리 이름도 없었다. 겸손이 근육에 밴 지식인들이 그저 ‘소학(小學)이나 합죠’ 유교의 경전을 해석하기 위해 고대의 문자들을 조금씩 벗겨 보이며 봉사하는 작은 도구라는 뜻. 청나라 한족 지식인들의 학문적 도피처인 금석학(金石學)
금석학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지식인들이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둔 지적 열망과 그렇게 공명했다. 그리고 그 파장은 멀리 반도에 있는 한 선비의 마음에까지 와 닿았다. 그 선비는 추사(秋史)였다. 나비 날개보다 더 여린 지적 공명의 효과였다.
일은 알차게, 목표는 올바르게, 그러나 차분하게, 정성껏, 그리고 섬세하게.
바로 실학의 요체였다. 다섯 달의 연경여행 추사는 그곳에서 단순히 무엇을 배운 것이 아니라 깨달았다. 학(學)이 아니라 각(覺)이었다.
19세기 말, 중국 문화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 부패, 음풍농월, 무의미한 복고의 몸부림 등으로 새로운 창의력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회 속에서 한자 역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언어로서의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자에게 짜릿한 역전을 가져다준다. 다시금 매료된 중국 지식인들은 표음화라는 개화파 지식인들의 거센 압력 속에서도 한자의 정체성을 곽말약이 ‘갑골문자(甲骨文字)연구로 지킴.
* 간체자시대 (중국, 간체자로 중화민족의 미래를 열다)
중국의 두터운 문은 결국 아편전쟁의 포탄으로 열리고 말았다. 중국인들은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 아편이 오히려 중국인들을 오랜 잠에서 깨어나도록 지독한 패러독스. 아편에 절어 있던 마음이 포성에 의해 깨어난 것도 잠시, 중국 지식인들은 새로운 중독에 빠져들었다. 서구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열등감. 반성은 문화적 성찰에서부터 시작. 화살은 이내 유교문화로 겨누어졌다. 목표는 제대로 겨눈 셈.
“과거의 역사를 논해 본다면 1000분의 999는 공자의 학설이거나 도가의 요사스런 언설에 불과할 뿐”
“공자의 유교를 폐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자를 없애야한다.
당연히 이 문자의 명(命)을 혁(革)해야 한다.“
혁명의 완성을 위한 속죄양으로 한자가 지목되었다.
중국인들의 머릿속에서 한자를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대신 알파벳으로 새로운 표음문자를 ‘병음자모(拼音字母)’
한자로 글을 쓰는 소설가 루쉰까지 한자 폐지를
“漢子不滅, 中國必亡”
그러나 한자는 중국인들에게 또 다른 종교라는 사실.
중국인들의 무지는 어쩌면 감수성 짙은 자연환경 속에서 형성된 노자류의 뿌리 깊은 흙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 흙을 깨고 씨앗을 심고 계절 따라 바람 따라 살면서 ‘제왕의 삶이 나와는 관계없음’의 삶을 살아온 것이 중국의 일반대중. 그 삶의 철학 속에서 퇴적된 무관심이 바로 문맹의 모습. 결국 중국인들의 문맹은 그들 나름으로 또 하나의 처세술이었다.
중국어의 표음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데 수십 년이 걸림 역설이지만 결국 사투리가 한자를 살린 셈이다.
한자가 태어난 지 거의 4000여년 만에, 진시황이 강제로 문자를 통일한지 약200여 년 만에 한자는 또 한 번의 문자 혁명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한자를 제대로 다룬 왕조들은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으며 그 속에 살아남았다. 진,한,당 나라가 그랬다. 그리고 이제 신 중국이 또 그러하다.
아이콘텍스트, 한자는 죽지 않는다.
한자는 왜 이토록 끈질기게 그 상형성을 유지해 오면서 시대마다 색과 향이 다른 문화의 꽃들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일까. 내면적으로 지니고 있는 ‘상형의 힘’ ‘이미지의 힘’ 중국인들은 한자를 바라보며 ‘시각’ ‘청각’ 한자가 숨기고 있는 이미지의 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글이 아니라 그림을 보며 성장한 사람들이 중국인들이다.
바람에 들꽃 날이듯 수백 종의 사투리로 흩어지던 언어들도 끝내 중국 문화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한자 글꼴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실루엣 때문이다.
한자는 스스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힘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다. 지나온 과거사를 변함없는 모습으로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문자.
복잡하던 글꼴의 한자는 이제 불과 26개의 자판으로 모두 두들겨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진부함의 대명사였던 상형문 한자는 이제 디지털 문화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그림언어‘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 글꼴이 되고 말았다. 상형문들이 도태된 가장 큰 이유는 ’쓰기‘의 번거로움, 하지만 IT기술은 그런 불편함을 너끈히 해결. 게다가 그 오래된 글꼴들을 ’멋‘으로 바꾸어 주었다. 인류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역전이다.
결국,
한자는 21세기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를 읽고 정리한 글